△ 어린시절 부모님과 함께 해수욕장에서 (1938년)


한빛누리 재단을 설립한 故 김정철 장로는 1932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자유와 평등을 실천하는 아버지와 늘 감사의 기도를 잊지 않는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주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를 나갔는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는 그 때는 몰랐지만 교회학교에 다닌 경험을 통해 믿음을 갖게 되고 하나님을 알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고 故 김정철 장로는 기억한다.

어머니는 늘 감사의 기도를 잊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외할아버지는 학교를 세우고, 교육사업을 하셨지만 정작 본인의 딸은 가르치시지 않아 어머니께서는 무학이셨죠. 하지만 성경을 통해 한글과 한문을 터득하셨습니다.

새벽에 잠을 깨서 나와보면 어머니는 항상 무릎 꿇고, 나라를 위해, 이 땅의 통일을 위해, 우리를 위해, 쉼 없이 기도하고 있으셨습니다. 


그 어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 1940년대 중국 대련(大连)의 풍경 - ⓒWikipedia


그는  중국  대련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본인 학교에 다녔는데, 일본어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늘 주눅 들고 열등감에 휩싸여 학교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수학시험에서 100점을 맞았다. 당시 일본인 여교사는 일본 학생들 앞에 한국인 소년 김정철을 내세우고, 힘든 상황 가운데, 그가 얼마나 잘했는지 칭찬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를 통해 소년 김정철은 '나도 해낼 수 있구나.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사람에 대한 자신감과 희망을 품게 되었다. 


혼란스러운 시대적 상황들 가운데 서울로 돌아온 소년 김정철은 당시 평양에서의 학제를 서울에서 인정해주지 않는 등의 이유로 바로 학교에 취학하지 못했다. 그는 남동생과 함께 구두닦이와 신문 판매 등을 통해 힘들게 생활을 이어갔다. 먹고 사는 문제가 절박했던 당시, 두 형제가 직접 생활전선에 나서야 했는데, 이러한 시대적 상황들을 늘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던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는 이들을 위한 학원을 세웠고, 이를 통해 소년 김정철은 대광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볼 수 있었다. 

△ 학도병 입대 직전, 동생 김정식과 함께 (1950년)


고등학교 2학년 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고교생 김정철은 학도병으로 입대했다. 카투사로 종군했는데, 장진호 전투로 알려진 삼수갑산 산악지대에서 격전을 벌이다 큰 부상을 입게 되었다. 밀려오는 죽음의 공포와 싸우며 절망하던 그 순간, 갑자기 어려서부터 다닌 교회학교가 생각났고, 하나님을 찾으며 기도했다. 

기도의 응답이었을까, 부대는 퇴각하면서 부상 당한 그를 놓쳤지만, 마지막으로 후퇴하던 다른 부대의 미군 병사를 통해 그는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그는 큰 부상을 했음에도 죽지 않았고, 포로로 살지도 않았으며, 불구가 되지 않았다. 일본 후쿠오카 미 육군 병원과 동경 미 육군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받을 수 있었고, 명예제대를 했다. 

1951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부산으로 피난 온 대광고등학교 3학년에 다니며 대입을 준비했고,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난 노력파였어요. 그 때 실력이 서울대학에 들어갈 정도가 아니었는데, 군대 가서 부상을 당한 것도 학교에서 크게 인정해 준 것 같아요.

서울대학에 들어가리라는 생각조차 못 했기 때문에, 시험 결과 나오는 날, 집에는 알리지 않고 혼자 발표장에 몰래 갔었는데, 합격을 확인하고 마냥 좋았어요.

당시엔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했는데, 
지금 가만히 생각하면 하나님이라는 절대자가 그 입학을 가능하게 해주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 서울대 공대 건축과 축구팀 기념촬영 (뒷줄 우측에서 두번째, 1955년)

△ 꿈과 희망만이 보이던 결혼식장에서 (1959년 11월 14일)

△ 노량진교회
(1975년 제2회 한국건축문화대상_작품상)

△ 전주서문교회
(1984년 제10회 한국건축문화대상_작품상)

△ 한국기독교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 협의회
(1990년 한국건축가협회상_작품상)

△ 제1회 전국주택 공모에서 주택단지계획 1등 당선 (건축가 안영배씨와 공동작, 1957년)


어린시절 중국 대련에서 살며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던 청년 김정철은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또한, 가정교사로 일하며 학비를 벌고, 동생들을 공부시켰다. 

졸업 후 종합건축사무소, 한국산업은행, 한국은행 등에서 일했고, 1967년 동생 김정식과 함께 '정림건축'을 창립했다. 이후 한국외환은행 본점, 서울대학교 본관, 삼양사 본관, 연세대 100주년 기념관,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월드컵 경기장, 인천국제공항, 청와대 본관, 청와대 춘추관 등을 설계하며 한국의 대표적인 건축가로의 업적을 남겼다. 

어머니와의 추억이 선명한 후암장로교회를 '건축가 김정철'의 이름으로 설계하기도 했고, 노량진교회,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 순교자기념관, 전주 서문교회 등 한국교회 건축의 현대화에 힘썼다. 

또한, 남서울은혜교회 홍정길 목사와 함께 북한 지원 사역에도 함께 했다. 2004년말에는 개인재산으로 교육과 선교, 민족화해 사업을 펼치는 한빛누리 재단을 설립했다. 그는 재단 창립 1주년 세미나에서 다음과 같은 환영사를 남겼다.

사실 저는 일평생 건축물을 설계하는 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넘치게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부르시기 전에 일생을 통해 받은 이 크나큰 복을 그분의 뜻을 따라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를 기도해왔었습니다.

이것이 제 인생의 후반에 제게 맡겨 주신 청지기로의 역할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제 생각보다 빨리 여러 여건을 허락하셔서 몇몇 분들과 뜻을 모아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선교재단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소박한 생각은, 이 재단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을 길러내는 일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변화시킨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믿었고, 지금도 그 믿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직접 가르치고 훈련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탁월한 분들도 많고, 앞서 행하시는 교회와 단체들도 많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또 하나의 사업, 또 하나의 운동을 벌이기보다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길러내는 일들을 힘 있게 펼쳐갈 수 있도록 그 여건과 환경을 조성하는 일, 그리고 이 방면에 훌륭한 역량을 지니신 교회와 단체들을 전략적으로 발굴하고 지원하는 일을 해나가고자 합니다.

- 故 김정철 설립이사장,
한빛누리 창립1주년 나눔전략세미나 (2006. 8. 30) 환영사 중에서